[데스크 칼럼] 기업을 살리는 구조조정의 원칙

입력 2024-01-16 17:53   수정 2024-01-17 00:41

2020년 3월 어느 날. 두산그룹 재무담당 임원은 산업은행 기업금융본부 문을 급히 두드렸다. 유동성 위기를 겪던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에 긴급 자금을 수혈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다. 그 임원은 봉투 하나를 먼저 건넸다. 두산 오너 일가 30여 명이 지주회사인 ㈜두산 지분을 담보로 내놓겠다는 각서가 담긴 봉투였다. 두산중공업에 ‘면사첩(免死帖)’을 주면 모든 걸 걸겠다는 ‘증표’를 내놓은 셈이다. 당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군말 없이 3조원의 긴급 자금을 투입했다. 진정성과 절박함에 대한 화답이었다.
대주주의 책임과 고통 분담
2010년 말 선산까지 담보로 내놓고 사재를 출연한 금호아시아나그룹 사례도 지금까지 회자된다. 박삼구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등 오너 일가는 2200억원 규모의 사재 출연 및 지분 포기 각서를 채권단에 제출했다. 이후 금호산업 등 4개사가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을 거쳐 살아남았다. 두 대표적 구조조정 사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하나다. 오너 일가가 자신들의 ‘뼈’를 깎아 기업을 살릴 ‘피’ 같은 돈을 빌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지난달 말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을 신청한 태영그룹과 엇갈리는 대목이다. 태영은 워크아웃 개시를 위해 태영인더스트리를 매각했다. 하지만 대금 일부(890억원)를 태영건설에 납입하지 않으면서 ‘꼬리 자르기’ 논란에 휩싸였다. 정부가 “남의 뼈가 아니라 자기 뼈를 깎으라”고 몰아붙인 뒤에야 백기 투항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12일 시작된 태영건설 워크아웃은 구조조정 시대가 다시 오고 있음을 알리는 서막일지 모른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 부실로 이미 수많은 건설사의 이름이 ‘다음 타자’로 오르내리는 지경이다.

한국 기업 구조조정사(史)에 새겨진 기본 원칙은 선명하다. 대주주의 책임과 고통 분담 그리고 이에 기반한 경영 정상화다. 대주주는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온전하게 져야 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사재 출연과 출자 전환, 감자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야 채권단에 고통 분담을 요구할 수 있다.
'속도감+질서' 있는 구조조정 필요
대주주의 ‘백기’를 손에 쥔 채권 금융회사들은 신속하게 신규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채권의 우선순위를 따지고, 투입 자금 할당을 놓고 싸우는 순간 해당 기업은 망한다. 물론 직원들도 예외일 수 없다. 인력 구조조정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부는 이 과정에서 심판을 자처하기보다는 경영 정상화를 돕는 우군이 돼야 한다.

‘속도감과 질서 있는 구조조정’도 필요하다. 정부와 정치권은 오는 4월 총선 표심에 눈이 팔려 구조조정 시계를 거꾸로 돌려선 안 된다. PF 옥석 가리기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당장 냉정한 기업 신용위험 평가를 바탕으로 부실기업을 단계적으로 퇴출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즉각 시행해야 한다.

10여 년 만에 다시 구조조정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대주주의 책임과 고통 분담, 정치의 배제 그리고 속도감과 질서 있는 구조조정. 이 모든 게 어우러져야 비용(자금 지원) 대비 누리는 사회적 편익(일자리 유지 등)이 큰, 즉 ‘가성비’ 높은 기업 구조조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경영 정상화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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